박찬익(朴贊翊)은 1904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신민회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1년 2월 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ㆍ신흥강습소ㆍ간민교육회 조직 등 간도지역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가하여 총무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하였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시작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쑨원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하였고, 봉천 군벌과 외교교섭을 벌여 간도지역 한인 동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힘을 쏟았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흥(嘉興), 항주(杭州) 등지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고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좌우합작 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 한중 양 민족의 합작을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박자혜(朴慈惠)는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 총독부가 총탄을 발포하는 등 평화적인 대한광복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하여 각 병원에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총독부의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낀 박자혜는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대한광복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였고 간호사들과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4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베이징으로 오자 소개받아 혼인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22년 고국으로 돌아와 박자혜 산파라는 산파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였다. 한편 중국에 있는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임무를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한성 지리가 생소한 나석주를 도와 사전에 길을 안내하는 등 나석주의 의거가 성공리에 추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양근환(梁槿煥)은 1919년 고향에서 3ㆍ1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고 노동과 고학을 병행하였다. 근근히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한국인 유학생들의 생활을 보살폈고, 대한국의 광복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할 뜻을 품기도 하였다.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일제가 민족분열통치를 실시하는 가운데, 친일세력 육성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국민협회였으며 회장 민원식은 한민족이 말과 정신을 모두 버리고 충실한 일본신민이 되어 일본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1921년 2월 16일 민원식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여 한국인 유학생으로 신분으로 속이고 도쿄역 호텔 14호에서 숙박하고 있는 민원식을 찾아가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라고 질타하며 가슴에 품었던 비수를 뽑아 처단하였다. 의거 후 호텔을 빠져나와 나가사키항으로 가서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도쿄로 호송되었다. 도쿄지방법원에서 당당한 기세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며 대한국의 광복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간 옥고를 치렀다.
박재혁(朴載赫)은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과 함께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간도 길림(吉林)에서 창단된 의열단(義烈團)은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시키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의열단(義烈團)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에 대한 보복으로 폭탄과 군자금을 건네주며 박재혁에게 거사를 권유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지령에 따라 상하이에서 부산에 잠입,고서(古書)를 파는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하여 폭살시켰다.
윤기섭(尹琦燮)은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신민회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 간도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0여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할 많은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직접 주장하였다.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요구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광복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1935년부터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활동한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대한광복운동세력이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하면서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홍병기(洪秉箕)는 1918년 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기사를 보고 대한국도 민족자결 원칙에 의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천도교의 최린(崔麟) ·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역시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1919년 1월과 2월 권동진과 만나 대한광복운동 실행을 위하여 동지를 모을 것을 제의하였다. 2월 25일, 권동진에게 거사에 동참할 동지가 모집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본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것이며, 민족대표로서 선생도 참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2월 27일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건의서에 서명 · 날인하였다. 다음날 저녁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 불교계의 인사와 회합하여 거사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하였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직후 일본 관헌에 붙잡혔다. 1920년 민족대표들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을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15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출소한 후, 1922년 7월 14일 대한국
안공근(安恭根)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직후 공범 혐의로 한 달 남짓 심문을 받았고 빌렘 신부, 안정근과 함께 안중근이 있는 뤼순 감옥으로 갔다.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안공근은 일제에 대항해 당당하게 싸운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하였다. 안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말을 배우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였다. 1914년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간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초의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안공근은 독립운동촉성회, 암살 비밀단체인 팔인단,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1년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을 통솔하였으며 한국국민당 이사, 임
류동렬(柳東說)은 1904년부터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활동하며 육군 기병 정위, 육군 참령 등을 역임하였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무관들과 비밀결사인 효충회(效忠會)를 조직하였으며 신민회,서우학회, 서북학회 등 애국계몽단체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중국으로 망명한 류동렬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0월 국내로 잠입하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혐의로 191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1918년 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으로 1년 반 동안 활동하였다.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1931년 일제의 간도 침략으로 중국으로 이동한 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과의 연합단체인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당되자 당의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군사위원을 역임하고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참모부장으로 선임되어 군사계획을 수립·추진하는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후 참모총장으로 임시정부의 군
김도연(金度演)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문과 일문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는 한편, 태극기를 준비하여 동경 시내에서 대한광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경 유학생 임시총회라는 이름으로 2.8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김도연은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동경시내를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일경들이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 학생들을 붙잡아갔으며 7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어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2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삼일신보(三一申報)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유학생들의 친목 도모와 독립운동 후원에 힘썼다. 워싱턴의 아메리카대학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섰으나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한계를 느껴 실업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대
우재룡(禹在龍)은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강제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는 1907년까지 근무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지휘하는 청송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최세윤(崔世允) 대장 등 산남의진의 핵심인물들과 함께 체포되어 내란죄라는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1911년 옥고에서 풀려나 박상진(朴尙鎭)과 함께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했다. 대한광복회 본부의 지휘장이자 국외 연락책임자로서 간도로 파견되어 길림에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혁명기지의 건설에 힘썼으며, 군자금 모집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경주에서 세금을 운송하는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백원을 탈취하기도 했다. 국내자산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1917년 포고문을 발송하고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20년 6월 주비단(籌備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