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金星淑)은 3·1 대한광복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한성 본회 및 각 지방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으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베이징에서 광저우 지역으로 옮겨 1928년 한국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고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성숙은 1936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1월 26일에는 3·1절기념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태수(文泰洙)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늑결의 비보를 듣고 구국투쟁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산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무주 원통사(圓通寺)로 부대를 이동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무주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906년 9월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확장하였고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후 전국 각지를 오가며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을 토멸하는 영웅적인 항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오르자 호남의병대장으로 호남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양주로 향하였다. 1908년 1월 말 허위가 거느리는 3백여 명의 별동대가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자 덕유산으로 귀환하여 다시 항일전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1908년 2월 2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
양한묵(梁漢黙)은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補安會)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가 설립되자 이에 힘을 보탰다. 1905년 윤효정, 이준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창립하고, 입헌군주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 창립된 호남학회(湖南學會) 임시회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초기 천도교의 핵심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며 교리 정리와 체계화에 힘을 쏟았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는 등 동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을 비롯하여,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등 천도교 교리서를 편찬하며 동학의 교리를 근대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교리강습소에서 천도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많은 천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 당시 많은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대한광복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과
계봉우(桂奉瑀)는 홍명학교의 교사가 되어 한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1910년 영생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가르침에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구국운동에 힘썼다. 1911년 초 북간도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간민회(간민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로서, 후에는 학감으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ㆍ조선역사ㆍ오수불망(吾讐不忘)을 편찬했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ㆍ이동휘가 주도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 安重根傳)을 연재했다.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6년 11월 하마탕에서 일제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3년 간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원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철광단에 가입해 단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북간도 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사료수집위원회의 위원과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탁과 함께 임시정
장석천(張錫天)은 광주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광주시내의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26년 11월 초 광주고등보통학교ㆍ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신사상의 보급과 연구, 식민지 교육체제 반대 등을 목표로 하는 성진회가 결성되었다.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8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며칠 전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ㆍ일 학생 간의 충돌로 광주지역 한일학생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1929년 11월 3일 11.3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 중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일제는 한인 주동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는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였다. 광주지역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대한광복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결의했다. 광주고보생들에게 전단을 작성하고 각
안명근(安明根)은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사촌형 안중근(安重根)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고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이후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양성, 매국노 이완용ㆍ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신민회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각도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도별 모금액을 결정했다.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ㆍ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ㆍ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황해
이종희(李鍾熙)는 1919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망명 후 대표적인 의열단체로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동참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류자명(柳子明)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 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하여 10여 명의 의열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여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의열단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박찬익(朴贊翊)은 1904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신민회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1년 2월 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ㆍ신흥강습소ㆍ간민교육회 조직 등 간도지역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가하여 총무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하였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시작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쑨원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하였고, 봉천 군벌과 외교교섭을 벌여 간도지역 한인 동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힘을 쏟았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흥(嘉興), 항주(杭州) 등지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고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좌우합작 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 한중 양 민족의 합작을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박자혜(朴慈惠)는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 총독부가 총탄을 발포하는 등 평화적인 대한광복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하여 각 병원에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총독부의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낀 박자혜는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대한광복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였고 간호사들과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4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베이징으로 오자 소개받아 혼인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22년 고국으로 돌아와 박자혜 산파라는 산파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였다. 한편 중국에 있는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임무를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한성 지리가 생소한 나석주를 도와 사전에 길을 안내하는 등 나석주의 의거가 성공리에 추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양근환(梁槿煥)은 1919년 고향에서 3ㆍ1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고 노동과 고학을 병행하였다. 근근히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한국인 유학생들의 생활을 보살폈고, 대한국의 광복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할 뜻을 품기도 하였다.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일제가 민족분열통치를 실시하는 가운데, 친일세력 육성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국민협회였으며 회장 민원식은 한민족이 말과 정신을 모두 버리고 충실한 일본신민이 되어 일본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1921년 2월 16일 민원식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여 한국인 유학생으로 신분으로 속이고 도쿄역 호텔 14호에서 숙박하고 있는 민원식을 찾아가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라고 질타하며 가슴에 품었던 비수를 뽑아 처단하였다. 의거 후 호텔을 빠져나와 나가사키항으로 가서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도쿄로 호송되었다. 도쿄지방법원에서 당당한 기세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며 대한국의 광복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간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