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타임스 마태식 기자 ] 권영진후보가 5일 대구시장에 당선되었다 .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 온지 불과 6개월 만에 거둔 놀라운 성과이다 .그 동안 지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놀라운 기세로 대구시장후보에 올라 마침내 대구시장으로서 자신의 꿈과 시민에 대한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또한 대구시장 당선자의 지나온 삶이 새롭게 조명 받으며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는 대구경제를 일으켜 세울 인물로 지역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한몸에 받고 있다 .
권 당선자는 5일 시민들에게 드리는 당선 소감에서 “저의 승리는 대구시민의 승리이고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260만 시민의 뜻이 모인 결과”라며 ( 이러한 지지가 ) 대구를 되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잘사는 대구, 행복한 대구를 만들어 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시민여러분께 약속한 경제혁신, 공직혁신, 교육혁신, 분권혁신, 안전혁신 등 5대 혁신을 반드시 성공하여 시민이 주인 되는 시민행복도시 대구를 건설하겠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청년들이 돌아오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약속 지키겠다. 경제를 살리고 기업이 일하기 좋은 도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학부모가 안심하며, 선생님이 보람을 느끼도록 교육혁신을 이루겠습니다. 여성이 배려 받고 존경받으며, 가정이 화목하고 서민들이 살기 좋은 복지도시를 만들겠다고 한 약속 꼭 지키겠다고 말했다.
"시민이 주인되는 시민속의 시장, 시민이 어렵고 힘들 때 편히 기댈 수 있는 시장, 낮은 자세로 시민을 섬기는 을의 시장이 되어 할 일 많은 대구를 위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세계로 서울로 미친 듯이 뛰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내었다 .
또 ,3대 도시의 위상을 되찾고, 대구의 명예와 대구시민의 자존심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대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권 당선자는 1961년 안동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등학교때는 대구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을 했으나 . 정치, 경제, 철학 등을 영어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정치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전국 최초로 대학원 총학생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이끌기도 했고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정무보좌역과 공보보좌역으로 활동했지만 두 번째 도전 역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2004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탄핵의 역풍 속에서 2,000표(1.9%) 차이로 석패하고 말았다. 한나라당 노원(을) 위원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당선에 일조하면서 약관43세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2008년 18대 국회의원 당선이 되었다. 그래서 정치와 행정을 겸비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시 부시장 재임 중 언론과 서울시 의회로부터 ‘역대 최고의 정무부시장’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장애인 인권과 복지에 주력해 ‘서울시 장애인부시장’이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학등록금 인하, 만5세 무상유아교육 실현 등에 앞장섰고, 사단법인 「교육과 나눔」의 운영이사로서 저소득계층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개천에서 용 만들기’의 가능성에 도전했었다.
정치 선진화 실현을 목표로 18대 국회 민본21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줄곧 ‘국정과 당 쇄신, 당 화합’에 앞장서 왔으며, 몸싸움 없는 국회를 위한 ‘국회개혁 5대 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2009년 황조근정훈장 수훈을 비롯하여 시민단체와 언론이 수여하는 각종 국회의원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