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李夏榮)은 외아문 주사·사헌부 감찰·전환국 위원을 거쳐 1887년(고조 24) 9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그뒤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이 되었다. 미국은행에서 200만 달러의 차관을 교섭했으나 위안스카이의 중상과 방해로 실패했고, 1889년 귀국할 때 정교한 철도모형을 가지고 와 고조 광무제에게 보임으로써 이후 철도 부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기국 사사(機器局 司事)·외아문 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 회계원장이 되었다. 1897년 주일본특명전대사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뒤 귀족원경·중추원 의장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의 국권침탈과 이권약탈에 앞장섰다. 1904년 6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일본공사 하야시와 결탁하여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겨주려 했다. 전국에서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고 보안회(保安會)가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보안회 회원 8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1905년 법부대신 을사늑약 불법 늑결에는 반대했으나, 친일적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암살을 기도했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로 무사했다. 1907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한일 강제합병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작위를 받았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