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수(柳正秀)는 1881년 신사유람단이 파견되었을 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유길준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다. 이들은 게이오의숙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유학생으로 입학한 경우라 일본 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일본 언론에는 조선의 양반 출신이나 관직이 없는 젊은 서생으로 소개되었다.귀국한 뒤 1894년 한성부윤에 임명되는 등, 유길준, 윤치호, 박영효, 박정양 등과 함께 친일 성향의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다. 1895년 한성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최초의 지구단위 도시 정비 지침으로 평가되는 도로를 범(犯)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체 금하는 명령을 발표하였다.192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뒤 연임되어 참의직을 4회 지냈다.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유교 계열의 중심 인물이다.일본 정부가 경술늑약 불법 늑결 후 1912년 논공행상을 하면서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바 있고, 다이쇼 일왕과 쇼와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다이쇼대례기념장, 쇼와대례기념장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