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식(趙秉式)은 1858년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검열·정자를 거쳐 1862년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뒤 대사성·성천부사·이조참의·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에 가서 흥선헌의대원왕의 석방을 교섭하여 귀국시켰다. 1888년 외무독판으로 전권대표가 되어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한러육로통상장정을 체결하여 경흥(慶興)을 새로운 개시장으로 지정했다.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였다. 이어 이조판서·공조판서·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1892년 11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관할내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보내왔으나 묵살했다. 1893년 2월 삼례 집회가 열리자 교조신원은 지방관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처리할 수 없으나 도내의 동학도에 대한 침탈은 금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여 해산시켰으나, 동학교도들이 그의 탐학불법을 논함으로써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요청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독립협회의 강요로 고조 광무제가 중추원관제를 공포한 11월 4일 밤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兪箕煥), 법부대신 이기동(李基東)과 모의하여 독립협회가 황제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정치를 실시하려 한다는 익명서(匿名書)를 시내 거리에 붙이게 하고, 독립협회가 대통령에 박정양(朴定陽), 부통령에 윤치호(尹致昊), 내부대신에 이상재(李商在) 등을 임명하려 한다고 고조 광무제에게 무고(誣告)했다. 고조 광무제는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독립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11월 26일 열린 만민공동회 대표와 고조 광무제의 면담에서 유기환·이기동·홍종우(洪鍾宇) 등과 함께 8흉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처형이 요구되었다.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1899년 중추원의장이 되고, 이듬해 탁지부대신이 되고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다녀와 의정부 참정으로 법부대신서리를 겸했다. 1902년 이후 궁내부 특진관·외부 대신·내부 대신·참정 대신·판돈녕부사·장례원경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