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普雨)는 경기도 양주(楊州)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문정왕후(文貞王后)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부임했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그는 유생들의 반대 상소 속에서도 불교융성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전기에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이 강제 통합되어 세력이 줄어든 데 이어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의 존재마저 희미해진 당시에 봉은사(奉恩寺)에 선종(禪宗)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교종(敎宗)을 두게 하여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을 부활시켰다.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종단을 부활하는 데 전념했고 종단이 안정되자 판선종사(判禪宗師)와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갔다. 1559년 다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으나 1565년 문정왕후(文貞王后)가 죽은 뒤 제주도로 귀양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