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1559년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후 박순(朴淳),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文子)·열자(列子)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1575년(선조 8)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한성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