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月山大君)은 왕세자로 책봉된 아버지가 1457년 죽자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으며 1471년 월산대군으로 봉해졌다. 3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 등 권신들이 종실의 대표격인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하고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월산대군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하였다.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월산대군은 이처럼 권신들의 농간을 겪게 되자 양화도(楊花渡) 북쪽에 망원정(望遠亭)을 짓고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1473년 덕종(德宗)이 추존되어 부묘(祔廟)되기 전에 덕종(德宗)의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했으며 어머니인 인수왕후(仁粹王后)의 병을 간호하다 죽었다. 부드럽고 청아한 문장을 많이 지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여러 편이 수록되었다.
왕실의 일부였던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독립한 궁가(宮家)를 통칭하여 궁방(宮房)이라 했으며 궁방(宮房)은 소속 궁실(宮室)의 제사나 재산 보관을 담당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사패(賜牌)나 절수(折受)를 받아 토지를 매입하거나 수세지(收稅地)를 확보하는 등 토지소유를 확대함으로써 소작료 수입을 증대시켜 재산을 늘렸다. 궁방(宮房)의 토지에 속하면 조세를 면제받는 특혜가 있어 일반 민전 가운데 투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19세기 중반에는 궁방(宮房)의 토지가 약 4만여 결에 이르러 정부의 조세수입을 감소시켜 1894년 궁방전(宮房田)의 면세를 폐지시켰다. 조선시대 4궁방은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이다. 수진궁(壽進宮)은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옹주들을 합사(合祀)하는 사우(祠宇)로 변했다. 명례궁(明禮宮)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으로 인조 이후에는 왕실의 사고(私庫), 왕후의 소용(所用)에 내탕(內帑)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다. 광조 대에 경운궁(慶運宮)으로 개
이하영(李夏榮)은 외아문 주사·사헌부 감찰·전환국 위원을 거쳐 1887년(고조 24) 9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그뒤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이 되었다. 미국은행에서 200만 달러의 차관을 교섭했으나 위안스카이의 중상과 방해로 실패했고, 1889년 귀국할 때 정교한 철도모형을 가지고 와 고조 광무제에게 보임으로써 이후 철도 부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기국 사사(機器局 司事)·외아문 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 회계원장이 되었다. 1897년 주일본특명전대사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뒤 귀족원경·중추원 의장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의 국권침탈과 이권약탈에 앞장섰다. 1904년 6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일본공사 하야시와 결탁하여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겨주려 했다. 전국에서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고 보안회(保安會)가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보안회 회원 8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1905년 법부대신 을사늑약 불법 늑결에는 반대했으나, 친일적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암살을 기도했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류정수(柳正秀)는 1881년 신사유람단이 파견되었을 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유길준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다. 이들은 게이오의숙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유학생으로 입학한 경우라 일본 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일본 언론에는 조선의 양반 출신이나 관직이 없는 젊은 서생으로 소개되었다.귀국한 뒤 1894년 한성부윤에 임명되는 등, 유길준, 윤치호, 박영효, 박정양 등과 함께 친일 성향의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다. 1895년 한성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최초의 지구단위 도시 정비 지침으로 평가되는 도로를 범(犯)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체 금하는 명령을 발표하였다.192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뒤 연임되어 참의직을 4회 지냈다.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유교 계열의 중심 인물이다.일본 정부가 경술늑약 불법 늑결 후 1912년 논공행상을 하면서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바 있고, 다이쇼 일왕과 쇼와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다이쇼대례기념장, 쇼와대례기념장도 받았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 세력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11년 만에 귀국한다. 귀국 후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하고, 이어 7월 2일에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 사업으로 내세워 독립협회를 창설했다.1898년 독립협회와 수구파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독립협회에서 중추원 관제 개편을 시도하려 했을 때, 새로 정권을 장악한 조병식 등 수구파가 독립협회 관민공동회 인사들을 모함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려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으며 이 보고는 수구파에 의한 조작으로 무고로 판명되었다. 고조 광무제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주요 인사 17명을 구속했다. 11월 5일 이후 만민공동회는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실천, 독립협회의 부설과 황국협회의 행동 세력이었던 보부상 혁파 등을 요구하며 약 50여 일간 경복궁 앞에서 상소운동 등 정치 투쟁을 벌여 구속되었던 17명이 석방되었으나, 만민공동회는 박영효 등을 중추원 의관으로 천거하는 등 고조 광무제와 수구세력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나갔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한성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쌀장수 현덕호(玄德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여러 시민들이 주로 당시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 요구, 한러은행 개설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면서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의 러시아 고문단 철수와 한러은행의 철폐조치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그 후 거의 날마다 열린 대중집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다루어지는 안건마다 그를 담당하는 총대위원이나 대표위원을 직접 뽑아 회의 결의사항을 집행하는 직접 대표제와 같은 민주적 운영방식으로 더욱 활발해졌으며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갔다. 1898년 10월 29일 개막연설은 백정 박성춘(朴成春)이 했고,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다.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이권 양여와 차관 도입, 외국 군대의 지원, 외국과의 조약을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여 시행할 것,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포할 것, 중죄인은 공판에 회부하되 자복한 후에 재판
중추원(中樞院)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설치된 내각의 자문기관이었으나, 경술늑약 불법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들이 한일 강제 합병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기관이 되었다.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은 1910년 9월 30일자로 공포되고, 10월 1일자로 시행된 총독부중추원관제(總督府中樞院官制)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1910년 12월 12일 중추원의사규칙(中樞院議事規則)이 제정되었고, 1918년 1월 19일 중추원사무분장규정(中樞院事務分掌規程)이 제정, 공포되었다.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1915년 7월 착수하여 이완용 등 고문 11명을 조사위원으로, 찬의 류정수(柳正秀) 등 15명을 실무자로 선임하고 미우라·이마니시·구로다를 편집 주임으로 위촉하였다. 중추원은 의장, 부의장, 고문 15명, 찬의(贊議) 20명, 부찬의(副贊議) 35명, 서기관장, 서기관 2명, 통역관 3명, 속(屬) 3명을 둔다. 의장은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보한다. 친일파들에게 나눠준 유일한 정치적 관직인 부의장에는 김윤식(훈2등 자작), 고문에는 이완용(훈1등 백작), 박제순(훈1등 자작), 고영희(훈1등 자작), 조중응(훈1등 자작), 이지용(훈1등 백작), 권중현(
민영기(閔泳綺)는 1879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1898년 군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기여했다.1905년 을사늑약 당시, 탁지부대신으로서 한규설과 함께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으나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가 되었고, 이왕직 장관에도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이 불법 늑결된 후 늑약 늑결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6년 무단 통치 시기에 결성된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문화 통치 시기에 발맞추어 한국인 위주의 친일 단체로 변신할 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 총독부 중추원(總督府 中樞院)의 고문에도 임명되었다. 1923년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었다.
유기환(兪箕煥)은 1894년 주일 대리공사로서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상하이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를 석방·귀국시켰다. 1896년 궁내부협판·궁내부대신서리사무·한성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외부협판으로 독일에 광산채굴권을 양여하는 교섭에 참여하여 조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897년 중추원이등의관·법부형사국장·특명전권공사를 지냈으며, 명성황후가 복위되어 발인이 행해지자 조문을 온 각국의 외교관들을 접대했다. 1898년 외부대신서리·군부협판·서리대신사무 등을 역임했다. 3월 외부대신 민종묵(閔種默)이 러시아에 절영도 조차를 허락하는 공문을 만들게 했으나 반대했다. 9월 심상훈(沈相薰)·민영기(閔泳綺)·고영근(高永根) 등과 함께 대한은행(大韓銀行)을 창립했다. 독립협회가 급진적으로 되고 중추원 관제가 공포되자, 그해 11월 조병식(趙秉式)·이기동(李起東) 등과 모의하여 독립협회가 황제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정치를 실시하려 한다는 익명서를 시내 거리에 붙이게 하고, 독립협회가 대통령에 박정양(朴定陽), 부통령에 윤치호(尹致昊) 등을 임명하려 한다고 고조 광무제에게 무고했다. 고조 광무제가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독립협회를 혁파하라는
조병식(趙秉式)은 1858년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검열·정자를 거쳐 1862년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뒤 대사성·성천부사·이조참의·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에 가서 흥선헌의대원왕의 석방을 교섭하여 귀국시켰다. 1888년 외무독판으로 전권대표가 되어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한러육로통상장정을 체결하여 경흥(慶興)을 새로운 개시장으로 지정했다.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였다. 이어 이조판서·공조판서·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1892년 11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관할내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보내왔으나 묵살했다. 1893년 2월 삼례 집회가 열리자 교조신원은 지방관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처리할 수 없으나 도내의 동학도에 대한 침탈은 금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여 해산시켰으나, 동학교도들이 그의 탐학불법을 논함으로써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요청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독립협회의 강요로 고조 광무제가 중추원관제를 공포한 11월 4일 밤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兪箕煥), 법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