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일본 상인이 대거 진출하여 개항장 중심의 무역뿐만 아니라 한성에 상설 점포를 개설하였다. 1898년 6월 30일 원세성(元世性) 등이 발기인이 되어 황국협회(皇國協會)를 결성했다. 경무사(警務使) 신석희(申奭熙)가 이를 인가했고, 7월 2일 황태자가 협회 경비로 1,000원을 주었다. 7월 7일 훈련원 발회식에서 나라를 문명부강하게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숭하고 충군하는 대의를 밝힌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는 한편, 회장 이하 107명의 임원을 선출했고 구성원의 대부분은 보부상이었다. 초대 회장은 전 농상공부 대신 정낙용(鄭洛鎔)이었으나, 9월 법부(法部)의 민사국장(民事局長) 이기동이 수천 명의 보부상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조직력을 강화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었으며,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고영근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황국협회는 1898년 10월 12일 민선의원 설립의 건백서를 정부에 올렸다. 국세를 진기(振起)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민선의원을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황제권 강화를 통한 군주의 절대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각 계층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하원 개설을 통한 부국강병을 계획했으나 진전되지 못했다. 대한제국 건국
러시아는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했다.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2월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한성에 진주했다. 2월 10일 선전포고를 했으며 2월 23일 일본은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 정부에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요양으로 향했다. 요양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여세를
홍종우(洪鍾宇)는 1890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기메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1893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 도중 일본으로 갔으며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저격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이일직(李逸稙)을 만나 그의 사주를 받고 급진 개화파의 일원으로 가장, 김옥균에게 접근하였다.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했으며 청나라 관원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으나 조선의 석방 교섭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189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고조 광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신임을 얻어 요직에 올랐다.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며 중추원 관제 개편과 입헌군주제 개혁을 주장하자 이기동(李基東), 길영수(吉泳洙) 등과 함께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홍종우는 고조 광무제에게 외국군대 철수와 방곡령 실시,상공업 육성책,외국공사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11 차례 올렸다. 1903년 친일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득세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늑결 후 통감통치를 했다. 1907년 6월 대한제국이 일제 침략상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토 히로부미가 외상 하야시 다다스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정미늑약을 작성하여 1907년 7월 24일 정식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였다. 정미늑약은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휘를 받을 것, 대한제국 정부가 하는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대한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이를 구별할 것, 대한제국의 고등 관리의 임명·면직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관리로 등용하지 못함을 명문화하고 권한을 확대했다. 정미늑약은 비밀각서가 첨부되어 있고 비밀각서는 군대 해산을 비롯하여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함으로써 차관정치(次官政治)를
궁내부(宮內府)는 대한제국 황실 관련 사무를 총괄한 관청이다. 조선시대는 국정 사무와 왕실 사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 종친부와 의빈부, 돈녕부 등 왕실과 관련된 사무가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었다.1894년의 통치기구 개혁으로 왕실과 관련된 행정을 일반 행정과 완전히 분리하여, 의정부에서 왕실 업무를 떼어내 궁내부에 맡겼고 궁내부의 수장은 궁내부대신이 맡았다.시종원(侍從院)은 1895년 궁내부 산하에 신설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승정원과 갑오개혁 이후의 승선원을 계승하여 황제의 시종과 시강 업무를 맡았다. 시종원 산하에는 황제의 비서 업무를 맡는 비서감과 황제의 건강 상태를 전담하는 전의사를 두었다. 1895년 궁내부 조직이 축소되면서 경연청, 시강원,내의원이 폐지되어 해당 기능이 시종원으로 이관되었고 시종원의 수장은 시종원경이다. 1899년 광무개혁을 통해 의정부를 정책 결정 기구로, 궁내부는 집행부로 삼아 대한제국의 양부 체제를 갖추는 변화가 이루어졌고 궁내부는 계속 확대되어 1902년 26개의 원국사를 포함한 대관제가 되었다. 이는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근대화와 관련된 사무를 궁내부에 배치시켜 직접 통제했으며 궁내부가 1904년까지 계속된 광무개혁을 주
탁지부(度支部)는 1894년(고조 31) 11월 성립된 김홍집(金弘集)·박영효(朴泳孝) 연립정권은 일본인 고문관들이 기초한 정부개혁안을 채택, 다음해 3월 공포했다. 이때 8아문(衙門)이 7부(部)로 개편되면서 탁지아문도 탁지부가 되었다. 기본 업무는 탁지아문을 계승하여 정부의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의 사무 일체를 통괄하며,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구성은 탁지부 대신 아래에 협판(協辦)을 두고, 그 아래에 총무국을 개편한 대신관방(大臣官房) 및 사세국(司稅局)·사계국(司計局)·출납국·회계국·서무국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지세과(地稅課) 등 11과를 두었다. 회계법이 제정되고 근대적 예산제도가 새로 채택됨으로써 사계국은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지출예산의 승인, 수입·지출의 과목(科目), 세입·세출의 등부(登簿), 경비결산의 심의, 은행관장 등을 맡고, 출납국은 국고에 속한 현금·물품의 관리출납, 경비지출의 집행 및 출납의 결산 등을 관장했다. 황실경비의 예산·결산·보관·출입 사무는 궁내부 회계원에서 관장하였다. 탁지부의 관원은 대신과 협판이 각 1명씩 있으며 국장·참서관(參書官)·주사(主事)·재무관(財務官) 등이 있었다. 재정의 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1899년(광무 2년) 8월 14일에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다.대한제국이 건국된 이후 황제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시키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 총재 윤용선(尹容善), 의정관 서정순(徐正淳), 이재순(李載純), 리센들, 브라운 등이 전문 9조의 국제(國制)를 기초하여 고조 광무제의 재가를 받아 확정하였다. 1899년 8월 17일자로 내려진 조칙과 봉지(奉旨)에 따라 제정 반포된 대한국 국제는 근대 제국의 절대군주제를 도입하여 황제권의 전제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한 제국이며 대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5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 항만세(恒萬歲) 불변할 전제 정치이다.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며 공법(公法)에 이르는 자립 정체이다.대한국 대황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며 편제(編制)를 정하고 계엄 ·해엄을 명령한다.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고 그 반포와 집행을 명령하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效倣)하여 국내 법률로 개정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을 명령하고 공법에 이른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다.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문무
보우(普雨)는 경기도 양주(楊州)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문정왕후(文貞王后)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부임했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그는 유생들의 반대 상소 속에서도 불교융성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전기에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이 강제 통합되어 세력이 줄어든 데 이어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의 존재마저 희미해진 당시에 봉은사(奉恩寺)에 선종(禪宗)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교종(敎宗)을 두게 하여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을 부활시켰다.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종단을 부활하는 데 전념했고 종단이 안정되자 판선종사(判禪宗師)와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갔다. 1559년 다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으나 1565년 문정왕후(文貞王后)가 죽은 뒤 제주도로 귀양갔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8도16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16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1559년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후 박순(朴淳),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文子)·열자(列子)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1575년(선조 8)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