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朴載赫)은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과 함께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간도 길림(吉林)에서 창단된 의열단(義烈團)은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시키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의열단(義烈團)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에 대한 보복으로 폭탄과 군자금을 건네주며 박재혁에게 거사를 권유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지령에 따라 상하이에서 부산에 잠입,고서(古書)를 파는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하여 폭살시켰다.
윤기섭(尹琦燮)은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신민회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 간도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0여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할 많은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직접 주장하였다.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요구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광복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1935년부터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활동한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대한광복운동세력이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하면서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홍병기(洪秉箕)는 1918년 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기사를 보고 대한국도 민족자결 원칙에 의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천도교의 최린(崔麟) ·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역시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1919년 1월과 2월 권동진과 만나 대한광복운동 실행을 위하여 동지를 모을 것을 제의하였다. 2월 25일, 권동진에게 거사에 동참할 동지가 모집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본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것이며, 민족대표로서 선생도 참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2월 27일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건의서에 서명 · 날인하였다. 다음날 저녁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 불교계의 인사와 회합하여 거사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하였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직후 일본 관헌에 붙잡혔다. 1920년 민족대표들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을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15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출소한 후, 1922년 7월 14일 대한국
안공근(安恭根)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직후 공범 혐의로 한 달 남짓 심문을 받았고 빌렘 신부, 안정근과 함께 안중근이 있는 뤼순 감옥으로 갔다.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안공근은 일제에 대항해 당당하게 싸운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하였다. 안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말을 배우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였다. 1914년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간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초의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안공근은 독립운동촉성회, 암살 비밀단체인 팔인단,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1년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을 통솔하였으며 한국국민당 이사, 임
류동렬(柳東說)은 1904년부터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활동하며 육군 기병 정위, 육군 참령 등을 역임하였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무관들과 비밀결사인 효충회(效忠會)를 조직하였으며 신민회,서우학회, 서북학회 등 애국계몽단체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중국으로 망명한 류동렬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0월 국내로 잠입하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혐의로 191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1918년 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으로 1년 반 동안 활동하였다.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1931년 일제의 간도 침략으로 중국으로 이동한 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과의 연합단체인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당되자 당의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군사위원을 역임하고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참모부장으로 선임되어 군사계획을 수립·추진하는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후 참모총장으로 임시정부의 군
김도연(金度演)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문과 일문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는 한편, 태극기를 준비하여 동경 시내에서 대한광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경 유학생 임시총회라는 이름으로 2.8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김도연은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동경시내를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일경들이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 학생들을 붙잡아갔으며 7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어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2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삼일신보(三一申報)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유학생들의 친목 도모와 독립운동 후원에 힘썼다. 워싱턴의 아메리카대학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섰으나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한계를 느껴 실업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대
우재룡(禹在龍)은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강제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는 1907년까지 근무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지휘하는 청송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최세윤(崔世允) 대장 등 산남의진의 핵심인물들과 함께 체포되어 내란죄라는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1911년 옥고에서 풀려나 박상진(朴尙鎭)과 함께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했다. 대한광복회 본부의 지휘장이자 국외 연락책임자로서 간도로 파견되어 길림에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혁명기지의 건설에 힘썼으며, 군자금 모집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경주에서 세금을 운송하는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백원을 탈취하기도 했다. 국내자산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1917년 포고문을 발송하고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20년 6월 주비단(籌備團)
송진우(宋鎭禹)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학생들에게 훈시를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며 학생들에게 실력 양성론을 전파했다. 1918년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1918년 12월이후부터 1919년 1월 사이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비밀리에 독립선언과 3.1 대한광복운동을 기획하였으며 일본에 있던 송계백으로부터 일본 도쿄의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으며 종교계와 연락하여 기독교세력과 천도교세력의 협력을 위한 밀담을 준비하여 성사시켰고, 3.1 대한광복운동 후에 일경의 첩보망에 걸려 투옥당하였다.1921년 9월 동아일보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20개 이상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김성수, 이광수를 객원논설위원으로 기용하였다. 송진우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바꾸어 교육중심주의, 계몽주의, 신중론 등을 주장하였다.1931년 5월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시작하여 모금운동과 함께 충무공 알리기에 힘썼다.7월에는 학생 하기방학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
김재규(金載圭)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기도 하다.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6사단장,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등 요직을 역임한 후 예편하였다. 그 뒤 호남비료사 사장을 거쳐 다시 현역으로 복귀 3군사령관을 거친 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 건설부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여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한 이유로 들었다.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았다.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 및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k-2로 총기 난사하였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교수형에 처
김광제(金光濟)는 동래경무관(東萊警務官) 재직 중인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친일파 탄핵과 내정의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06년 대구로 옮겨 서상돈과 함께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서상돈(徐相敦)은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으며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되었다. 광문사(廣文社)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은 외국의 선진 학문을 소개하고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國債)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뜻을 갖게 되었다.1907년 1월 광문사(廣文